천주교인천교구영종성당

주보성인 성 바르나바

성 바르나바
영문명 ST. BARNABAS the Apostle
축일 6월11일
신 분 사도, 순교자
활동지역 에데사(Edessa)
활동연도 1세기
성바르나바사도 성바르나바사도

사도.키프로스섬의 레위족 출신으로, 바르나바란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극찬을 받은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사도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원래 요셉(Josephus)(사도4:36)이며 성 마르코의 사촌(골로 4:10)이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봉헌하였다. 이때 사도들이 그에게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기 신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의 공동체를 설득하여 바오로(Paulus, 6월 29일)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했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어 그곳의 공동체를 둘러보기도 하였다(사도 11,22 이하). 그리고 바오로를 타르수스(Tarsus)로부터 그곳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오로와 함께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공동체에 안티오키아의 기부금을 전달하였고,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Joannes Marcus)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바오로와 함께 안티오키아 지방과 예루살렘 지방을 왕복하면서 예언자와 교사로 활동했고(사도 11:22 이하), 바오로의 제 1차 전도여행에 동반하였다(사도 13:4-14:26).

사도회의에서 바오로와 함께 유태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사이파 출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격렬하게 논쟁하였다(사도 15:1-29). 그 뒤 바울로의 제 2차 전도여행 때 팜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이유로 마르코의 동행문제로 바오로와 의견이 갈라져, 마르코와 함께 키프로스섬으로 떠나갔다(사도15:36-39).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바오로와는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1고린 9:6, 골로 4:10에도 바르나바에 대한 기록이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가 지은 ≪Hypotyposeis≫,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위(僞)글레멘스의 ≪성서성훈≫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중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재회록≫(Recognitiones)에 의하면 마태오와 동일인이라고도 한다. 테르툴리아노의 ≪De pudicitia≫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르나바라고 말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성 바르나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Roma)에서 전교하였고, 키프로스 교회의 설립자로 인정받으며, 61년경에 살라미스에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위경인 바르나바의 편지가 그에게 헌정되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70년과 100년 사이 알렉산드리아의 신자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나바의 복음서는 이탈리아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듯하고, 바르나바의 행전은 요한 마르코의 업적일 것이다. 7세기 ≪로마 미사사본≫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고 9세기 이후 축일표에는 6월 11일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가톨릭대사전 인용)